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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아이돌/AV 여배우

타카스기 마리, 소녀가 울었던 그날의 밤 [下]

by 정칼럼 2021. 8.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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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카스기 마리가 부르는 '지나오다(닐로)'

마리는 2019년 10월, 한국 유튜브 활동을 시작했다. 비록 바나나몰이 개최한 '친한파 총선'에서는 꼴등을 기록했지만, 고무적인 건 있었다. "나도 한국을 정말 좋아한다고!"라는 호소가 통했는지 득표수가 꽤나 올랐다. 후카다, 오구라를 상대로 제법 선전했다.

 

본인은 마리의 '타카스기 마리 TV'에 깊숙이 참여하진 않았다. 업무상 일본에 나갈 일이 있으면 서로 밥을 먹으며 유튜브에 대한 의견을 나누거나, 콘텐츠 소재를 제공하는 정도의 협력을 했다. 기본 대본을 써달라는 부탁이 간혹 있었는데, 그럴 땐 기꺼이 도왔다.

 

채널은 무난한 속도로 성장했다. 반년 만에 구독자 2만 명을 돌파했다. 시미켄, 츠보미, 오구라 유나 등 채널에 비해 편집과 진행 방식이 세련되진 않았으나, 마리 만이 갖고 있는 색깔로 구독자를 확보했다. 여기에는 마리 덕후 출신(...)이라고 주장하는 편집자의 역할도 한몫했다.

 

그러다가 그날이 왔다. 오랜만에 마리를 만나는 날이었다. 장소는 도쿄 닛포리(日暮里)였다. 어차피 술도 먹고 할 거, 유튜브 콘텐츠로 쓰자고 제안했다. 편집과 촬영을 맡고 있는 한국인 유학생 출신 김OO 피디(이하 김 군)도 함께 왔다. 희한하게 갑자기 비가 내렸다.

 

 

SPOTV 'UFC 읽어주는 남자' 中
HONEY TV 'BANANA SHOW' 中

나는 AV 업계 사람은 아니다. 엄밀하게 보자면, 평범한 회사원이다. 카테고리로 보면 기획하고 홍보하는 방송, 언론 쪽의 인간이라고 보는 게 맞을 게다. 2020년대의 테마가 '성(性)'에 있다고 판단했고, 이걸 어떻게 하면 대중적으로 풀어낼 수 있을까, 고민할 뿐이다.

 

AV 업계를 기웃기웃 거리며 느낀 게 하나 있다. 이쪽 바닥이라는 게 보통은 그런 모양이더라. 기구한 사연을 품고 일하는 이가 대부분이다. 하나의 콘텐츠, 영화로 다뤄준다고 해도, 결국엔 성을 간접적으로 사고파는 일이니까. 일반적으로는 금기시되는 행위가 이곳의 먹거리니까.

 

아이돌이 꿈이었다는 소녀가 AV 배우가 되어 전라를 드러낸다. 연예인이 되고 싶었다는 사람이 여럿 남자와 뒹굴고 있다. 현모양처를 꿈꿨다는 누군가는 침을 질질 흘리며 교미를 연기한다. 은퇴한다고, 소소한 삶을 살겠다고 떠난 이가 풍속점에서 일하거나 이름을 바꿔 다시 업계에 복귀한다.

 

그러니, 보통은 구구절절한 사연 따위, 그냥 듣고 흘린다. 그렇지 않으면 마음이 불편하다. 흔하디 흔한 얘기로 넘기는 게 편하다. AV 배우 개개인의 속사정이란 대개 기구한 법이다. 감정 이입을 하면 본인이 괴로워진다. 글을 쓰든, 콘텐츠를 만들든, 적어도 여기선 무감각한 게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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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만났다. 반가운 마음에 격한 인사를 나누고 맥주 한 잔 하러 들어갔다. 우오타미(魚民)라는 일본 체인 술집인데 가격이 저렴해서 자주 가던 곳이다. 마리는 나보다 주량이 쌔다. 아니, 웬만한 성인 남성보다 잘 마신다. 김 군도 대단한 애주가다.

 

1시간 정도 지났을까, 정신이 알딸딸한 시점, 마리가 AV 배우로 데뷔한 후 겪었던 일화를 꺼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친구였던 애가 있었단다. 중학교도 같이 다녔고, 집도 가까워서 자주 놀았다고 했다. 학교가 끝나면 매일같이 놀고, 집으로 가던 단짝이었단다.

 

"이 일을 시작하기 전에는 연락을 잘하던 사이였는데, 일을 시작하고 나서는... 한 번은 그 친구 생일 때, '늦어서 미안해. 생일 축하해'라고 연락을 했더니, '갑자기 뭐야? 왜 연락하는 거야? 병이나 조심해' 이러더라. 그런 식으로 말하는구나 싶었지"

 

유튜브 콘텐츠로 나갈 수 없는 사적인 얘기도 이어졌다. 자기가 갖고 있는 AV 배우로서의 연애관, AV 배우가 된 이후의 가족 문제, 친구 문제, 주변의 시선 등 어린 나이에 갑작스레 생긴 변화들에 대한 얘기였다. 그러다 갑작스럽게 '은퇴'라는 단어가 퇴어 나왔다. 곧 AV 배우에서 은퇴하고, 소소한 삶을 살고 싶다는 거였다.

 

"나는 은퇴 작품을 찍을 때 울지 않을 거 같아. 앗키 씨(あっき, 요시자와 아키호의 애칭)는 울었다지만, 나는 울지 않을 거야. 평소처럼 '수고하셨습니다' 이럴 거야"

 

 

한 번은 그런 적이 있었다. 몇 년 전이었던가, 지금은 은퇴한 여배우 'A'의 어덜트 굿즈 제작을 돕게 됐다. 제작사와 함께 패키지는 이런 구성이 좋겠고, 무게는 이런 정도가 좋겠고, 콘셉트는 이렇게 잡으면 좋겠다, 같은 내용의 회의가 이어졌다. 여배우 'A'는 간혹 모습을 드러냈다.

 

밝고 쾌활하고 무엇보다 꿈이 있어 보였다. 그녀는 이번 제품 발매와 더불어 AV 작품도 마지막으로 촬영하고, 자신은 여타 20대 여성의 일상으로 돌아갈 거라고 했다. 공부도 한 번 해보고 싶단다. 사실 AV 배우로 데뷔하게 된 이유도, 복잡한 가정사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진심을 다해 '업계에서의 졸업(卒業)'을 축하해줬다. 잘 됐으면 좋겠다고 느꼈다. 나이 어린 동생을 보는 느낌이었다.

 

시간이 흘렀다.

여배우 'A'는 현재 도쿄도내 타이토구 센조쿠 4쵸메(台東区千束4丁目)에서 일하고 있다.

 

 

"은퇴하고 다시 돌아오는 거 아닌가?" 내가 물었다.

 

AV 배우라는 게 보통은 그렇다. 은퇴와 번복을 밥 먹듯이 한다. 특히 마리 정도의 위치에 있는 키카탄 배우에게 개명과 복귀란 흔한 일이다. 한 번 AV 업계에 발을 들여 돈을 만져본 이라면,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간다는 게 쉽지 않다.

 

마리가 답했다. "돌아오는 경우가 많지. 하지만 나는 안 그럴 거 같아"

 

"이 일을 그만두고 나면 이력서에 뭐라고 적으면 좋을까? 2년 동안 뭘 했냐고 묻는다면... 니트(ニート, 자발적 실업자)였다고 할까(웃음). 거짓말은 아니니까 탤런트였다고 하면, 어떤 걸 했냐고 물어보면, '같이 보실까요?'라고 할까(웃음).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그런 사람이랑 같이 일을 해?'라고 말하는 상황이 있을 수도 있고..."

 

김 군이 말했다. "우리는 진심으로 타카스기 씨의 세컨드 라이프를 응원합니다. 다 잘 되실 겁니다"

 

고마리 양, 한국어 실력이 제법 늘었는데?

이날은 좀 특이했다. 보통 식사나 술을 먹고 나면 바로 해산의 느낌인데, 이 날따라 마리는 가라오케(カラオケ, 노래방)에 가고 싶다고 졸랐다. 이 정도로 취할 친구가 아닌데 말이지.

 

가라오케에서 노래를 부른 영상은 김 군이 촬영한 마리의 유튜브 채널에 그대로 남아있다. 조회수가 20만이 넘는다. 나름대로 히트한 콘텐츠로 남았다. 그날의 밤, 영상에 담을 수 없었던 장면을 살짝 털어놓자면, 노래를 부른 후 마리는 울었다.

 

많이 울었다.

 

*前 AV 여배우, 타카스기 마리는 2020년 4월 은퇴했다. 이후 배우로 복귀하지 않고 자신의 삶을 살고 있다.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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